코로나 시절, ‘킷사텐’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일본어로 ‘차(茶)를 만끽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커피, 차, 케이크을 팔고 때로는 오므라이스 같은 일본식 서양 음식을 내는 레트로한 분위기의 찻집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집안에만 갇혀 지낼 때 유튜브에서 다양한 공간의 ASMR을 찾아 듣다가 우연히 발견한 도쿄 킷사텐 ASMR 영상 (link). 달그락거리는 커피잔 소리, 나긋나긋하게 섞여 들려오는 일본어 대화, 그리고 그 뒤로 가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이 주는 포근한 느낌이 좋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5년 뒤, 이어폰으로만 접하던 그 공간을 직접 마주했다. 도쿄에서의 일정은 2주 남짓이었지만 마음에 드는 킷사텐은 꼭 두 번씩 찾았다. 동화책 속 부잣집의 응접실 같은 고풍스러운 분위기. 그 속에서 정성껏 내려진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도쿄 여행 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일정 중 하나였다 (두 번씩 갔던 곳들은 Aoyama Ichibankan, Chatei Hatou, Kayaba Coffee).
내가 방문했던 킷사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 따뜻함: 벽과 테이블, 카운터까지 목재 소재로 되어 있어 공간 전체가 부드럽고 따뜻했다.
- 찻잔 진열장: 커피를 만드는 공간은 기다란 바 (bar) 형태로 되어 있어 손님들이 그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바 뒤편 벽면에는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지닌 찻잔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데,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 빈티지: 곳곳에는 유럽의 빈티지한 느낌이 묻어나는 오브제들이 놓여 있었다. 작은 조각상, 벽화, 천 소재로된 커텐이나 테이블보 등 대체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 정중함: 여러 바리스타가 분주히 움직이는 보통 카페와 달리, 바 안쪽에는 정장에 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중년의 바리스타가 혼자 커피를 만들었다. 내가 갔던 킷사텐의 바리스타는 예외 없이 모두 남성이었다.

< 본차이나 >
Bone China. 말 그대로 뼛가루를 넣어 만든 도자기를 말한다. 18세기 중엽, 영국이 수준 높은 중국의 도자기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여러 실험을 하다가 점토에 소 뼛가루를 섞어 도자기를 만들어 낸 것이 시초라고 한다. 가볍고 얇지만 단단한 내구성이 특징이다.
본차이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된 건 시어머님 덕분이었다. 한국에 계시는 시부모님께서 여행 중 이틀간 합류하셨는데, 함께 킷사텐에 들렀을 때였다. 벽면에 진열된 찻잔에 푹 빠진 나에게 어머님께서 설명해주시기를 본차이나는 보온성이 뛰어나 커피를 오랫동안 따뜻하게 즐길 수 있게 도와주고 표면이 반투명이라 불빛에 비추면 찰랑거리는 커피가 비쳐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제 건우와 나는 어느 공간에 가든 잔부터 살핀다. 잔을 들어 빛에 비추어보고, 액체가 겉면으로 비치면 “본차이나군” 하며 괜히 전문가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커피의 온도가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지 느끼며 음미하는 일. 우리만의 사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 드립 커피 >
이곳에서는 기계를 많이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만드는 오래된 방식을 고수한다. 이를테면 커피 내릴 물을 냄비로 끓이는 식이다. 커피를 내리기 전에는 뜨거운 물을 잔에 가득 채웠다 비워내기를 반복하며 잔을 정성껏 데운다. 서빙된 후에도 커피의 온기가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는 섬세한 배려다.
본격적인 드립이 시작되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물을 붓는다. 그 순간 커피 원두에서는 마치 활화산이 폭발하듯 고운 거품이 차오르는데, 그 속도와 양이 워낙 대단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커피 거품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뉴욕 집으로 돌아와 직접 이 방식을 따라해보니 로스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주 신선한 원두에서만 그런 풍성한 거품을 만들 수 있었다. 역시, 신선하지 않으면 취급하지 않는 나라이다.
< 카푸치노 >
어느 킷사텐이든 메뉴판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커피는 하우스 블렌드였다. 그 아래로 싱글 오리진 원두들이 쭉 이어지는데, 산미가 강한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주로 무난한 하우스 블렌드, 조금 더 부드러운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킷사텐의 카푸치노는 특별하다.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블랙 드립 커피가 베이스가 되고, 그 위에는 생크림과 우유거품의 중간쯤 되는 밀도의 뽀얀 크림이 올라간다. 그 크림 위에는 아주 얇게 필링된 오렌지 껍질이 살짝 뿌려지고 잔 받침에는 시가처럼 길게 말린 실론 시나몬 스틱이 곁들여 나온다.
겉모습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인슈페너와 비슷하지만 맛은 다르다. 에스프레소와 생크림이 강렬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아인슈페너가 강 + 강의 조합이라면, 킷사텐의 카푸치노는 기름기 없는 담백한 크림과 차분한 드립 커피가 만나 서로를 은은하게 감싸 안는 맛이다. 코끝을 스치는 산뜻한 오렌지 향, 부드러운 크림, 그리고 잔잔하게 감도는 원두의 풍미까지. 나긋나긋한 감각의 연속이었다.



< 디저트 / 음식 >
디저트는 쉬폰 케이크, 치즈 케이크, 푸딩 등이 있고 대부분 맛이 괜찮았다. 캇츠산도나 오므라이스처럼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킷사텐들도 있었는데, 그곳들에 대해서는 따로 후기를 써볼 생각이다.


킷사텐 안에서 사람들은 주로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공간이 가진 분위기를 사랑하고 또 즐기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밝히는 형광등 대신 그림자를 남겨두는 램프 조명. 빠르게 내려지는 커피 대신 천천히 정성스럽게 준비되는 커피. 오래된 나무 가구에 배어든 묵직한 원두 향. 나 또한 그 포근하고 느리게 퍼지는 아날로그의 매력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곤 했다. 그 공간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향기로운 것들, 작고 아름다운 것들, 그리고 차곡차곡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것들. 그것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삶을 조금 느리게 살아가는 방법임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Leave a Reply